콘스탄틴 페렌바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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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콘스탄틴 페렌바흐(1852–1926)는 독일의 정치인으로,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중앙당 소속으로 총리를 역임했다. 그는 법학을 전공하고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1884년 프라이부르크 시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바덴주 의회 의원을 거쳐 제국 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며, 자베른 사건에 대한 연설로 이름을 알렸다. 1918년 제국 의회 의장을 지냈으며, 1920년 총선 이후 사회민주당, 민주당, 중앙당 연립 내각에서 사회민주당이 빠지면서 총리가 되었다. 베르사유 조약에 따른 배상금 문제로 연합국과 갈등을 겪다 내각이 사임했고, 이후 반유대주의 방호 협회 부회장과 국기단 설립에 참여했다. 1926년 프라이부르크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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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 페렌바흐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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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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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콘스탄틴 페렌바흐 |
출생일 | 1852년 1월 11일 |
출생지 | 독일 제국 바덴 대공국 벨렌딩엔 |
사망일 | 1926년 3월 26일 |
사망지 | 프라이부르크 임 브라이스가우 |
소속 정당 | 중앙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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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경력 | |
독일 제국 의회 의원 | 1903년 ~ 1913년 |
바덴 대공국 의회 의원 | 1885년 ~ 1887년 |
바이마르 국민의회 의장 | 1919년 2월 14일 ~ 1920년 6월 21일 |
독일국 의회 의원 | 1920년 6월 24일 ~ 1926년 3월 26일 |
바이마르 공화국 총리 | 1920년 6월 25일 ~ 1921년 5월 10일 |
제국의회 의장 | 1918년 6월 ~ 1918년 11월 |
바이마르 공화국 총리 | |
임기 시작 | 1920년 6월 25일 |
임기 종료 | 1921년 5월 10일 |
대통령 |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
부총리 | 루돌프 하인체 |
이전 총리 | 헤르만 뮐러 |
다음 총리 | 요제프 비르트 |
바이마르 국민의회 의장/제국의회 의장 | |
임기 시작 | 1919년 2월 14일 |
임기 종료 | 1920년 6월 21일 |
대통령 |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
총리 | 필리프 샤이데만 |
이전 의장 | 에두아르트 다비트 |
다음 의장 | 파울 뢰베 |
독일 제국 의회 의장 | |
임기 시작 | 1918년 6월 |
임기 종료 | 1918년 11월 |
황제 | 빌헬름 2세 |
총리 | 게오르크 폰 헤르틀링 바덴의 막시밀리안 |
이전 의장 | 요하네스 캠프 |
다음 의장 | 에두아르트 다비트 |
독일국 의회 의원 | |
임기 시작 | 1920년 6월 24일 |
임기 종료 | 1926년 3월 26일 |
선거구 | 바덴 |
바이마르 국민의회 의원 | |
임기 시작 | 1919년 2월 6일 |
임기 종료 | 1920년 5월 21일 |
선거구 | 바덴 |
2. 초기 생애
콘스탄틴 페렌바흐는 1852년 1월 11일 당시 바덴 대공국의 본도르프 근처 벨렌딩겐에서 교사 요한 게오르크 페렌바흐(Johann Georg Fehrenbach, 1826~1895)와 그의 아내 로지나(Rosina, 1832~1900, née Gensecke) 사이에서 태어났다.[4]
페렌바흐는 1884년 중앙당 소속으로 프라이부르크 시의원에 당선되어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1885년 바덴 대공국(주)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당의 교회 정책에 대한 이견과 당수 테오도르 바커와의 갈등으로 1887년 사퇴했다.
1865년부터 프라이부르크 소년 신학교와 베르톨트 김나지움(Berthold Gymnasium)에서 공부하였고, 1871년 졸업했다.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가톨릭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지만, 1875년 법학으로 전과했다. 학업 중 학생 사교 클럽에 가입하여 현지 부르주아 유력자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5] 1882년 프라이부르크에서 변호사 활동을 시작하여 곧 성공적인 형사 변호사가 되었다. 1879년 프라이부르크에서 마리아(Maria, 1855~1921, née Hossner)와 결혼하여 슬하에 딸 하나를 두었다.[4][6]
3. 정치 경력
1901년 주의회에 복귀, 1903년부터 1913년까지 제국 의회 의원을 지냈으며, 1907년 주의회 의장을 역임했다. 1913년 12월 3일, 차베른 사건과 관련하여 참모본부를 비판하고 입헌 국가 실현과 군부의 독자적 행동에 반대하는 연설로 주목받았다.[5] 1918년 제국 의회 의장에 취임했다.
1918년 독일 혁명 이후 1919년 바이마르 국민의회 의장을 맡았다. 1920년 총선 결과, 사회민주당, 중앙당, 독일 민주당의 연립 내각이 붕괴되자 중앙당의 페렌바흐가 총리에 지명되었다.
페렌바흐 내각은 베르사유 조약에 따른 배상금 문제로 연합국과 협상했으나, 프랑스의 강경한 태도로 난항을 겪었다. 연합국의 루르 지역 점령으로 협상은 교착되었고, 내각 내 분쟁 끝에 1921년 5월 사퇴했다.[10]
이후 1923년 반유대주의 방호 협회 부회장, 1924년 초당파 준군사 단체 “제국 국기, 흑·적·금” 설립에 참여했으며, 1926년 사망 시까지 중앙당 의원단장을 역임했다.
3. 1. 독일 제국 시기
페렌바흐는 1884년 가톨릭 중앙당 소속으로 프라이부르크 시의회 의원이 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이듬해 그는 다시 중앙당 소속으로 바덴주 의회(Landtagde)에 당선되었다. 1887년 바덴주 당 지도자 테오도르 바커(Theodor Wackerde)와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반가톨릭 문화투쟁 법률 철폐 문제를 놓고 의견이 충돌한 후 의원직을 사퇴했다.[5] 1895년 페렌바흐는 프라이부르크 시 정부(Stadtratde) 의원이 되었고, 1896년에는 구역 대표(Kreisabgeordneterde)가 되었다. 1901년 그는 바덴주 의회(Landtagde)에 재선되어 1913년까지 의원직을 유지했으며, 1907년부터 1909년까지는 의장을 역임했다.[6]
1903년 페렌바흐는 제국 의회 의원이 되었다. 1913년 12월 3일 그는 알자스-로렌의 자베른(자베른)에 주둔한 독일군에 대한 대중적 불만으로 촉발된 자베른 사건에 관한 연설로 독일 전역에서 명성을 얻었다. 그는 육군 참모본부를 비판하고 헌법 국가를 옹호하며 국가 내 국가로서의 군부에 반대하는 강력한 주장을 펼쳤다.[5]
1917년 페렌바흐는 국회가 휴회 중일 때 회합하여 정부와 외교 정책 및 전쟁 수행에 대해 논의할 수 있는 국회 본위원회(Hauptausschussde) 위원장이 되었다. 그는 합병 없이 협상을 통한 평화를 요구한 국회 평화 결의안(국회 평화 결의안)을 지지했다. 1918년 7월 페렌바흐는 마지막 제국 의회 의장이 되었다.[4][6]
3. 2.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1918년부터 1919년까지 독일 혁명기에 콘스탄틴 페렌바흐는 헌법 군주제를 지지하며 제국 의회를 소집해 군주제를 유지하려 했으나, 혁명 임시 정부인 인민대표평의회는 이를 반대했다.[7]
1919년 1월 19일, 여성에게 투표권이 주어진 독일 최초의 선거에서 페렌바흐는 바이마르 국민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해 2월 6일, 독일 헌법 초안 작성과 임시 의회 역할을 위해 국민의회가 소집되었을 때 페렌바흐는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최고위직 3자리를 독일 사회민주당(SPD)이 차지하자 중앙당이 반발했고, 국민의회 의장이 사임하면서 페렌바흐가 의장직을 맡게 되었다.[7]
국민의회 의장으로서 페렌바흐는 베르사유 조약 수용 여부를 결정해야 했다. 1919년 5월 12일 의회 연설에서 그는 "우리는 국제 동맹, 국제적 이해의 평화를 바랐습니다. 이것은 그러한 평화의 시작이 아니라 전쟁의 영속입니다."라고 말하며 조약에 반대했다. 그러나 국민의회는 조약을 승인했고, 페렌바흐 의장 재임 중 바이마르 헌법 논의와 승인이 이루어졌다.[7]
3. 2. 1. 총리 재임 (1920-1921)
1920년 라이히스타그 선거 결과, 제헌의회에서 정부를 구성했던 독일 사회민주당(SPD), 독일민주당(DDP), 중앙당으로 이루어진 바이마르 연정이 붕괴되었다. SPD는 좌익 경쟁 정당인 독일 독립사회민주당(USPD)에게 상당한 표를 잃었고, 이로 인해 중앙당, DDP, 중도우파 독일 국민당(DVP)으로 구성된 중산층 소수 내각이 구성되었다. 페렌바흐는 약간의 주저 끝에 총리직 제안을 수락했다.[5] 그의 정부는 라이히스타그 469석 중 168석(36%)밖에 확보하지 못하여 처음부터 어려움을 해결하기에 취약한 입장에 놓였다.[5]
총리로서 페렌바흐는 공산주의자 주도의 봉기인 3월 폭동(March Action)과 폴란드 반군의 제3차 실레시아 봉기를 처리해야 했는데, 이 봉기는 정부군에 의해 상당한 인명 피해를 내며 진압되었다. 사회 정책 측면에서 그의 정부는 실업 수당을 개선하여 1920년 11월 21세 이상 독신 남성의 최대 지급액을 7마르크에서 10마르크로 인상했다.[8]
그의 총리직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베르사유 조약 조항의 이행이었다. 페렌바흐는 1920년 7월 5일부터 16일까지 독일의 군축과 배상금이 논의된 스파 회담에서 독일 대표단을 이끌었다. 배상금 총액과 지급 조건은 1921년 초 파리와 런던 회담의 주제이기도 했다. 3월 첫 번째 런던 회담에서 페렌바흐와 그의 외무장관 발터 지몬스는 베르사유 조약에서 최종적으로 확정되지 않은 과도하게 높은 총 배상금에 항의했다.[9] 독일이 배상금 조건을 수락하도록 압력을 가하기 위해, 협상국은 5월 5일 런던 최후통첩을 발표했는데, 이는 독일이 런던 지불 계획과 베르사유 조약의 군축 요구 사항 및 독일 "전범"의 인도 요구 사항을 준수하지 않으면 연합군의 루르 점령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최후통첩이 발표되기 전에 미국 정부는 배상금 분쟁에 대한 중재자 역할을 해달라는 독일의 요청을 거절했고, 이로 인해 독일은 실행 가능한 선택권이 거의 남지 않았다. 5월 5일 전 며칠 동안 최후통첩에 대한 소문이 페렌바흐 내각에 전해졌고, DVP가 이미 정부의 외교 정책을 더 이상 지지하지 않겠다고 발표했기 때문에 내각은 5월 4일 사임했다.[10] 페렌바흐는 5월 10일 중앙당의 요제프 비르트가 그의 후임이 될 때까지 과도 정부를 책임졌다.
4. 총리 퇴임 이후
1922년 페렌바흐는 독일국가재판소(Staatsgerichtshof) 판사가 되었다.[6] 1923년 말, 라이히스탁의 중앙당 대표로 선출되어 1926년 사망할 때까지 그 직책을 유지했다.[6]
발터 라테나우 외무장관이 극우 민족주의 준군사조직인 오르가니자치온 콘술에 의해 1922년 6월 24일 암살당한 후, 페렌바흐는 반유대주의 방어 협회(Verein zur Abwehr des Antisemitismus)의 부회장이 되었다. 1924년에는 사회민주당(SDP), 자유민주당(DDP), 중앙당이 공동으로 설립한 무장하지 않은 군사적 조직인 국가기호 흑적금의 설립을 지지했다. 이 단체의 명시된 목적은 공화국을 적들로부터 비폭력적으로 보호하는 것이었다.[11]
페렌바흐는 1926년 3월 26일 프라이부르크 임 브라이스가우에서 사망했다.[4]
5. 사망
Constantin Fehrenbach|콘스탄틴 페렌바흐de는 1926년 3월 26일 프라이부르크 임 브라이스가우에서 사망했으며,[4] 프라이부르크의 명예 시민이 되었다.
참조
[1]
서적
Politische Köpfe aus Südwestdeutschland
Kohlhammer
[2]
서적
German Liberalism and the Dissolution of the Weimar Party System, 1918–1933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3]
학술지
The German Center Party and the Reichsbanner: A Case Study in Political and Social Consensus in the Weimar Republic
[4]
서적
Neue Deutsche Biographie 5
https://www.deutsche[...]
Duncker and Humblot
[5]
웹사이트
Constantin Fehrenbach
https://www.leo-bw.d[...]
2024-04-29
[6]
웹사이트
Konstantin Fehrenbach 1852–1926
https://www.dhm.de/l[...]
2024-04-30
[7]
웹사이트
Reichskanzler Constantin Fehrenbach
https://oecv.at/Biol[...]
2024-05-01
[8]
서적
The Great Disorder: Politics, Economics, and Society in the German Inflation, 1914–1924
Oxford University Press
[9]
서적
Walther Rathenau and the Weimar Republic: The Politics of Reparations
https://muse.jhu.edu[...]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0]
웹사이트
Das Kabinett Fehrenbach – Der Rücktritt des Kabinetts
https://www.bundesar[...]
2024-05-07
[11]
웹사이트
Constantin Fehrenbach
https://www.kas.de/d[...]
2024-05-07
[12]
서적
Constantin Fehrenbach (1852–1926)
Kohlham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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